언제 한번 제대로 정리해봐야지!
깨작깨작 일기장이나 노트에 적어두던 단상들을 언젠가 한 곳에 종합해 놔야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이 곳 저곳에서 이 플랫폼을 접하게 됐고, 여러 사람들의 글들을 보면서 나도 흩어져 있던 나의 조각들을 이곳에 모아보자는 생각을 했다. 29세의 어느 날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졌다던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20대의 마지막 1년을 남겨놓은 같은 시점에 나도 이렇게 시작하고 싶었다.
첫 글은 20대의 끝자락이라는 시점에 맞게, 스무 살부터의 나를 돌아보는 시간부터 가져보려고 한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전 세계에 수많은 이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느꼈던 3가지 울림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두고자 한다. 지금 생각해봐도 가장 크게 나를 이끌고 있는 생각 혹은 중심은 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 것 같다.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당연 스무 살로 돌아가 봐야 한다.
나는 10대에 겪어보지 못한 첫 실패를 스무 살의 시작에 겪었다. 나는 중, 고등학교 때 학교 총 학생회장도 했고, 공부도 썩 잘했으며, 나름 친구들도 많았던 꽤 괜찮은 학생이었다. 그렇지만 한 번에 대학에 들어가는 데 실패했고, 수 만 명의 재수생들과 함께 재수를 시작했다. 스무 살은 실패로부터 시작했다. 그렇지만 열심히 공부했다. 그만큼 점수도 계속 올랐고, 원하던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은 다시 커져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재수 학원 담임 선생님의 이야기가 있었다. 때는 재수생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여름 시기였고, 선생님이 느끼기에 학생들이 동기가 저하되었는지 평소엔 냉철하고, 본인 얘기를 잘 안 하던 분이 본인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어렸을 때, 동네에 있는 오락실 게임 중에 A라는 게임을 굉장히 좋아하셨단다. 승부욕도 굉장히 강했던 이 분은 게임이 끝나고 기록이 나오는 데, 늘 깨지 못하던 1등 점수가 있다고 했다.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오락실 게임 순위지만 어린 시절 이 분에겐 그게 굉장한 자존심이었고, 의욕을 불타 오르게 만드는 일이었단다. 열심히 동전을 쏟아부었고, 몇 날 몇 일 도전한 끝에 어느 날 드디어 1등 점수를 깼다고 한다. 중간 스토리는 기억이 안 나지만 이게 무슨 일이라고 굉장히 들뜨고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만 난다. 자존심을 얻고, 기록을 가졌다는 통쾌함이 어린 나이에 얼마나 대단하다고 느꼈었을까. '내가 짱이지 그럼'이라고 동네방네 자랑했겠지 싶다. 근데 메시지는 이 뒤에 나온다. 한참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던 중, 불현듯 '내가 이걸 깼으면 전 세계에 수많은 사람들 중에 이걸 또 깰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내가 할 수 있으면 남들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심. 그런 생각과 함께 본인은 스스로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내가 할 수 있으면, 남들도 다 할 수 있다.
재수생들에게 성적이 오르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오르는만큼 이들의 희망은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다. 어찌 보면 시험을 준비하는 많은 이들에게는 최고의 성적을 거두는 일보다 자신이 아무리 망해도 내려가지 않을 최저치를 올리는 노력을 하는 것이 시험 합격에 더 적합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잘하고 있다고 해서 자만할 필요도 없고, 내가 지금 잘하고 있다면 더 잘하고 있는 다른 누군가가 저기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거품에 찬 이들에게 겸손을 깨닫게 해주었던 이야기였다. 이후, 나는 적당하다고 생각했던 대학에 들어갔고, 스무 살에 처음 당한 실패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대학에 다니며 들었던 수업 중에 가장 값졌다고 생각한 수업에 대한 이야기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난 항상 답이 정해진 인생을 살았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늘 인생을 정답과 오답으로 분류하는 것. 시험에 합격한 이와 떨어진 이, 좋은 대학에 들어간 사람과 아닌 사람, 대기업에 입사한 자와 아닌 자. 경쟁을 부추기고, 편을 가르기 쉬운 이분법적 사고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갈 때까진 이러한 사고 프레임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늘 이 잣대와 함께했다. 그러다 대학에서 현대 철학에 대한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나는 자유전공학부에 입학했었기에 1학년 전공 수업은 법, 경제, 정치, 철학, 의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업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철학은 관심이 없던 분야였지만 학사 과정상 필수로 들어야 했기에 현대 철학 수업을 듣게 되었다. 다양한 주제를 다룬 수업이었다.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의 개념,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그리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등 다양한 현대 철학의 주제와 관련된 영화를 보면서 현대 철학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각각의 주제들을 보면 모두 귀결되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열린 사고. 기존의 점수화된 경쟁 사회에 익숙한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주제였고, 이것을 '체화' 하도록 수업을 영화 감상과 토론을 곁들여 구성한 것은 정말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좋았다. 아무튼 나는 이 수업에서 그렇다고 A+을 받지는 못했지만, 나에게 강한 울림을 준 수업으로 기억한다. 특히나, 수업 중에 니체의 진리 의지에 관한 이야기는 그 뒤로 나를 이끌어 가는 강한 힘이 되었다. 세상에 진리란 없고, 진리를 향한 진리 의지만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어떤 비판이 있든 내 인생에 있어서는 모든 것들을 의심해 볼 계기가 되었고, 심지어 확고한 기독교인인 나에게 종교에 있어서도 맹목적인 진리에 대한 믿음보다는 진리를 '향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새로운 방향을 갖도록 만들었다.
진리를 향한 진리 의지만이 진리를 만든다.
이때부터 내가 맹목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의심해보고, 기존의 것들에 대해 비꼬아보는 연습을 시작했던 것 같다. 먼저, 왜 다들 행정고시를 봐야 해? 대기업에 들어가는 게 왜 행복한 거야? 교환 학생은 왜 가야 하는 건데? 등등 내 인생에 닥친 문제들부터 수업이나 과제 등에서 주어졌던 것들에 다시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의 이유를 찾아가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도출해낸 이유는 매우 중요하다. 인생의 커다란 문제건 학습을 위한 어떤 개념이든지 스스로가 도출해낸 이유를 통해 나만의 진리를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그냥 정답을 만들어 가는 나의 의지만 남아있을 뿐이지. 따라서 남들의 이야기도 오답이 될 수 없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정답을 만들어 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니까.
마지막 이야기는 스웨덴에서의 교환 학생을 마무리하던 시점의 이야기다.
고등학생 때 막연한 유럽여행의 꿈을 꾼 적이 있었고, 그런 꿈 꾸는 시간은 그 시간을 견디게 해 준 행복한 꿈이었다. 막연한 바람이었지만, 대학 생활을 하면서 한국 사회만을 이해하고 있는 나에게 답답함을 많이 느꼈다. 특히나 학교에는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나와 다른 너'라는 느낌이었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 평볌하게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학생들의 공통된 시선이었다. 어느 순간 이것이 너무 편협하단 생각이 들었고, 이런 프레임을 깰만한 나라에서 지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과 정말 아주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나라. 나한텐 그곳이 스웨덴 같았다. 그래서 스웨덴으로 교환 학생을 가게 되었다. 아무튼 스웨덴은 이렇게 가게 되었고, 이런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하고 나 스스로도 많이 바뀌어진 모습으로 귀국을 준비하였고, 교환 학생 생활 중에도 몇몇 유럽 국가들을 여행하곤 했지만 마지막으로 가고 싶었던 몇 개국을 돌아보고 한국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스웨덴에 남아있던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느낌적인 느낌(?)으로 프랑스에선 낭만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지갑 도난.(그 안엔 스웨덴에서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모두 팔고 바꿔온 현금이 꽤 두둑하게 있었다..) 처음 당해본 상황이고, 몇 달 살면서 유럽이 익숙해졌던터라 방심하고 있던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도 느껴졌다. 아무것도 없던 나는 굉장히 긴장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숙소는 찾아가게 되었다. 숙소비를 지불할 수 없었기에 양해를 구하고 일단 하루를 묵게 되었다. 긴장하고, 당확스러웠던터라 손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정말 단 한 푼도, 카드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숙소에서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친구들과 연락이 되고, 마침 유럽을 여행하고 있는 다른 친구들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긴장도 풀리고 안도하기 시작했는데, 사람이 극도로 긴장을 하다가 그 긴장이 풀리기 시작하면 병이 나기 십상이더라. 나 또한 그러고 하루 이틀이 지나며 몸에서 이상 증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염증으로 보이는 종기 같은 것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지만 이게 커지기 시작하면서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하고 오한으로 이어졌다. 이때쯤은 이탈리아 로마를 거쳐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에서 머물다 아바타의 배경으로 유명한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 가고 있을 때였다. 아픈 걸 신경 쓰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었었는데, 버스 옆자리에 앉은 미국에서 온 여자분이 본인이 만든 샌드위치도 나눠주면서 아픈데 몸 잘 챙기라며 걱정해주기도 했었다. 애써 괜찮아지고 있는 척했지만, 플리트비체에서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 도착했을 때는 정신까지 혼미해질 지경이 되었다. 호스텔에 들어왔고 4인실을 배정받았다. 이 방에는 나 말고 같이 놀러 나가자던 룸메이트가 한 명 더 있었는데, 나는 정신도 차리질 못할 처지라 단칼에 거절하고 침대에 누웠다. 이때 염증은 고름이 검게 차오른 상태였으며, 검색해보았을 때 째고 곧바로 수술하지 않는 이상 나을 수 없다고 했다. 진통제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아 근처에 약국을 가보았는데, 마침 그날이 국경일이라 모든 약국이 문을 열지도 않았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나는 오로지 침대에 누워 있는 것 밖에 없었다. 한 번은 3일 동안 먹은 거라곤 그 샌드위치밖에 없었는데, 화장실에 한 번은 가야 할 것 같아서 화장실에 갔다가 잠깐 동안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 그때는 거의 정신력으로 그곳에서 버티기를 시작한 것 같았다. 그러다 결국 자그레브 3일 차에 아버지한테 연락을 하고 다음 날 비행기로 곧바로 크로아티아에서 한국으로 들어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나마 있는 비행기는 모스크바를 경유해 23시간을 가야 하는 것이었다. 시커메진 이 염증이 뭐길래.. 남들이 보면 정말 코웃음 치고 비웃을 수 있겠지 싶었지만 나한테는 정말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비행기에서는 제대로 앉아 있을 수 조차 없었지만 정말 정신력으로 의식을 붙잡고 한국에 들어왔다. 들어와서 곧바로 병원에 가서 수술하고 며칠 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아무튼 살아서 돌아왔고,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
낯선 나라에서 혼자 돈도 모두 잃고, 아프기까지 하면서 정신도 잃었다. 어떻게 보면 그냥 흔할 수 있는 유럽 소매치기 이야기와 병치레라고 볼 수 있지만,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아 사람이 쉽게 죽지는 않겠구나' 어떻게든 생존하려는 정신적 육체적 본능이 굉장히 강하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어도 나 자신은 '살아 나갈 수 있는 방향'으로 자기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든 생존하려는 정신적, 육체적 본능은 굉장히 강하다.
비단, 이 일 뿐만 아니라 어떤 다른 상황(예를 들어, 살 곳을 구한다거나 직장을 구한다거나 하는)들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도 이 '생존 본능'은 분명히 적용될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차피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며 아픈 일들 또한 시간에 따라 언제든지 지나가기 마련이다. 모든 일들은 '좋은 쪽'으로 나아간다고 믿으니까. 여기서 내가 할 일은 나의 본능을 믿고, 담담하게 지나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고통스러웠던 기내에서의 23시간도 결국에 지나갔고, 수술과 회복 기간도 언젠가 다 지나갔다. 나는 그저 나를 좋은 쪽으로 이끌어 가려는 내 정신적 본능과 회복하고자 하는 육체적 본능을 믿기만 하면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한 정신과 육체를 가졌다는 것을 정말 크게 깨달은 시간이었다.
인생이 참 재미있는 건 모두 똑같은 24시간을 공유하지만 다른 생각과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각자가 생각하는 구조와 방식, 내용들은 제각각일 거다. 그에 따라 지금 하고 있는 일들도 모두 다르고.(같은 일을 한다 해도 분명 다른 생각과 방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은 얼마나 재미있었고, 앞으로 재미있을지 이 곳에 계속 풀어나가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로 시작했으니 마지막도 하루키로 정리하자면, 그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서문에 인용된 말인데, 니체의 명언 중 이 문장을 담았다.
한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문구 중에 하나인데, 나는 이 말을 거꾸로 밤의 어둠의 깊이에 대해서 한낮의 빛에게 알려줄 필요도 있다라고도 해석하고 싶다. 어둠은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하고도 깊다. 그렇지만 그 어둠을 이해하고, 정의하고, 끄집어내다보면 한낮의 빛도 여러 색을 가진 찬란한 빛이 될 수 있다. 하나하나 세밀하게 쓰고 싶은 과거 경험들도 있고, 앞으로 내가 알아가고 싶은 새로운 내용들도 많다. 이 것들을 통해 다양한 색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하여, 2017년엔 이 곳에 글로 표현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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