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에 잠시 머무르게 되면서, 서점에서 하루키 책 두 권을 사들고 오게 되었다.
작년에 나온 신작 소설을 들고 오면서 문득, 한동안 소홀했던 내 브런치가 떠올랐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새로운 환경에 놓이면서 자연스럽게 브런치 쓰기는 우선순위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조각으로 남긴 내 흔적이자 일기보단 다듬어지고 유려한 에세이보단 가벼운 내 글들이 새삼 그리웠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하루키는 작가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꾸준함을 꼽는다. 예전에 책을 읽었을 당시에는 꾸준함의 의미를 그냥 당연히 그러겠지 정도로 이해했지만, 지금은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의미를 조금은 더 가깝게 느끼고 있는 듯하다. 꾸준하기란 어쩌면 대단한 능력일 수도 있다. 글쓰기에 한해서.
가볍게 지난 생활을 복기라도 해보면 글도 쓰고, 생활도 정리해보고 좋겠지 싶어 오랜만에 브런치를 열었다. 지난 몇 주간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소용돌이 속에 놓인 시간이었다. 마치 이 곳 싱가포르의 날씨처럼 다이내믹한 일상이 계속되고 있다.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싱가포르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트레이닝 차 캘리포니아로 날아가게 되었다. 본사가 실리콘밸리로 알려진 캘리포니아 멘로 파크라는 지역에 위치했기에 이 곳에서 1주일간 교육을 받고, 샌프란시스코로 이동을 해 1주일 더 머물게 되었다. 싱가포르도 처음이었던지라 어리둥절 1주일을 보냈는데, 곧바로 미국으로 가게 되면서 사실 첫 싱가포르에 대한 기억은 '우와 (국제) 도시다' 정도뿐이었던 것 같다.(자세한 이야기는 밑에서)
그러나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를 다시 방문하는 일은 그것도 그 시점(이곳에서 인턴을 하던)부터 바라보았던 회사의 직원으로 오게 된 건 정말 특별했다. 2년가량의 시간이 지났지만 SFO에 도착했을 때 이전에 몇 번 이 곳에서 뜨고, 돌아오고를 했던 익숙함이 남아있었다.(리프트를 Departure에서만 불러야 한다는 건 여전히 까먹고 있었지만.)
2년 전 이 곳에 왔을 때는 앞으로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누구를 만날지, 말로만 듣던 회사들은 어떻게 생겼는지 호기심도 참 많았었다. 자극이 될만한 요소들에 오감을 열어두고 무엇이든 흡수하고 가져가려고 노력했던 시기였던거 같다. 그런 호기심은 내 방향을 점점 그려가게 만들었고, 오늘 이 곳에 다시 오도록 만들었다. 감사하면서도 나름 스스로에게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들뜬 마음을 함께 온보딩하고 계신 분에게 마구 퍼부으며 이 곳에서의 일정을 시작했다.
실리콘밸리에는 여전히 많은 테크 기업들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리프트나 우버를 탈 때마다 드라이버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요 기업들의 새로운 캠퍼스들과 부지 확장 소식 등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샌프란에서도 예전에는 한참 공사 중이었던 세일즈포스 건물이 우뚝 솟은걸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회사들이 확장되면서 주변 집값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어 기존에 이 곳에서 생활이 왔던 분들이 집을 팔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비중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고도 했다.
실제로 예전에 같은 집에서 살던 중국인 친구로부터 이에 관한 직접적인 경험을 듣기도 했다. 이 친구는 그래픽 카드 제조사로 유명한 NVIDIA 본사에서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해 이번 기회로 만나서 점심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이 친구를 통해 NVIDIA의 새로운 캠퍼스와 들어가진 못했지만 애플의 새 캠퍼스를 둘러보기도 했다. 이 친구는 이렇게 주변 회사들의 투자가 이어지고, 새로운 직원들이 계속 늘어난다면 집값은 지금보다 당연히 더 올라갈 거라 판단하여 산타클라라 주변에 오래된 콘도를 샀다고 했다. 예전부터 워낙 손이 크고, 대범한 친구로 알고 있었지만 새삼 또 그녀의 추친력이 놀라웠다. 참 이 곳은 여전히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동한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서는 여전히 다양성과 더불어 자본의 무서움이 느껴졌다. 화려한 건물들 속에 길거리 수많은 갈 곳 없는 이들을 마주하면 허탈함과 함께 자본 앞에 펼쳐진 상반된 결과로 두려울 수밖에 없다. 언제든 나도 둘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그 어느 쪽도 두려운 존재이긴 마찬가지라는 교훈을 주기도 한다.
이렇게 2년 만의 재 방문 후, 한국에 잠시 들렸다 싱가포르로 돌아갔다.
지난 한 달간의 싱가포르
지금 돌아보면 가장 여유 있었던 첫 주에 이 도시를 낯선 이의 시선에서 어떠한 편견을 가지지도 않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더라면 '우와 국제도시다'외에 다른 느낌들을 많이 가졌을 텐데 싶은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의 나에게 이 도시는 '회사를 위한 공간'으로 너무 크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너무 일찍 이곳의 매력을 한정 지어 버린 감이 있다.
지금 임시로 머무는 곳과 회사 모두 Central Business District(CBD)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숙소에서 회사까지 걸어서 15분 정도 걸려 정말 편하게 출퇴근을 하고 있다. 집과 회사의 거리가 가까운만큼 평일엔 대부분 이 두 곳만 왔다 갔다 하는 정직한(?) 생활이 이어지고 있다. 건물 30층에 있는 오피스는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에 있어, 매일 아침 바다 전망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할 수도 있다.
이렇게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정말 멋지고 아름답다. 내가 가본 어느 지역보다도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경제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정말 다양하다. 아직은 3자 시점에서 매일 회사를 오가며 지나치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회사에 있는 다양한 지역의 팀들을 보면서 국제 도시로서의 싱가포르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생활환경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나에게 회사 이외에 이 도시가 나에게 갖는 의미를 찾기까지 지난 한 달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특히, 워낙 빠르게 움직이는 회사에 적응하느라 지난 한 달은 거의 온전히 회사에 쏟을 수밖에 없었다. 대단한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빠르고 거대한 집단에 적응하려면 어디선가 방전되고 있는 에너지가 많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보면 내가 뭐한거지? 싶지만 시간과 에너지는 순식간에 소모된다. 아직 내 페이스를 조절할 수는 없는 시점이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적절한 메커니즘이 자리를 잡아가기까지 앞으로도 좀 시간이 더 걸릴 듯하다.
다행히 얼마 전 생일이라고 지혜가 싱가포르로 건너와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곳들을 함께 가보기도 하고, 맛있는 곳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이 도시가 나에게 갖는 다른 의미들을 찾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아직 내가 보지 못한 다른 요소들도 많이 있겠구나 싶은 기대감을 심어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새로운 환경은 나에게 주어졌다. 이 환경에 대한 인상을 어떻게 만들어 갈지는 어떻게 보면 또 하나의 내 몫이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 곳의 의미는 분명 넓어지고, 달라질 거라 생각한다. 조금 여유를 만들어 갈 수 있을 때쯤, 회사보다 더 크고 다양한 의미의 싱가포르를 가지고 이 곳에 또 글로 남겨봐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은 왠지 맥도날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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